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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평전 - 이민웅 저

by monotake 2014. 3. 12. 0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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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평전
국내도서
저자 : 이민웅
출판 : 책문 2012.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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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통합적 관점에서 조명하다!

"이순신 평전"은 2012년,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420년째 되는 해를 맞이하여 역사적 사실을 기준으로 전쟁 영웅 이순신을 나름 객관적으로 재평가한 책이다. 저자는 이순신과 임진왜란에 관한 주요 사건을 중심으로 새로운 내용을 발굴하였으며, 이를 통해 기존의 이순신에 대한 오류를 바로잡고자 했다.  이순신의 가문과 성장배경부터 임진왜란 이전의 왜란기의 이순신 그리고 이후의 평가 등을 수많은 자료를 토대로 구성하였다. 

광화문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은 1968년 4월 27일 건립되었다.
드라마에서는 "자살"처럼 표현했지만 "전사"가 정설이다.

내용을 말해보면 

1. 이순신은 1545년 음력 3월 8일(양력 4월 28일), 한성부 건천동에서 태어났다. 이순신의 선대는 대대로 무장을 배출한 무반 가문이었다. 자구성가한 행정실무형 관료인 이변이 있었기에 이순신집안은 양반사대부 가문으로 든든히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2. 이순신은 어린 시절부터 문과의 길을 걷기위해 학업에 정진했다. 28 세에 도전한 그아 첫번째 무과응시는 처절한 실패로 끝난다. 4년뒤 선조9 년에 식년시무과에 다시 한번응시하여 병과 제4 인으로 합격했다. 

3. 조선 조정대신들의 각종 반대로 인해 여러 관직을 오간 이순신은 유성룡에 의해 전라좌도수군절도사에 임명되었다.

4. 일본군은 기습공격으로 임진왜란을 시작했다. 1592년 음력4월13일 부산진기습공격으로 시작한것이다. 임진왜란은 16세기 말에 동북아 삼국이 맞붙은 미증유의 국제적인 대전쟁이었다. 

5. 이순신의 첫번째 해전인 옥포해전은 총통을 이용한 당파 전술과 화살을 통한 개인 살상, 그리고 화공으로 일본군선을 분멸시킨 이순신 함대의 완승으로 끝났다. 

6. 이순신이 한산대첩을 위해 세운 작전이 두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육지로 도망치지 못하도록 넓은 바다로 유인하는 작전이고, 또다른 하나는 유인한 적함대를 포위 공격하기 위한 학익진전법이었다. 원균이 7척, 이순신과 이억기의 이전 전력이 49척, 나머지 3척은 거북선이었다. 해전은 순식간에 끝났고 조선 연합함대의 압승이었다. 와키사카의 함대는 대선 35척, 중선17척, 소선7척 등 모두 59척이 분멸 격침당했고 대장선인 대선 1척과 중선7척 소선6척 등 14척이 해전을 피해 부산쪽으로 도주했다. 일본수군이 입은 인명피해는 9000여 명에 이른것으로 추정된다.

7. 원균과 이순신의 사이가 좋지 못했다.

8. 임진년 말년 3국은 모두 전쟁에 임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9. 이순신의 리더십에는 크게 세가지 특징이 있다. 먼저 이순신은 지장으로서 누구나 인정할 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두번째 특징은 훌륭한 인품이다. 마지막은 소통의 리더십이다.

10. 조선조정은 수군을 활용해 적침을 막겠다는 해로차단 전술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결정적 실책을 저지르고 만다. 그것은 바로 삼도수군통제사를 이순신에서 원균으로 교체한 것이다. 이것은 이순신과 원균의 갈등관계와 두사람을 둘러싼 정치권의 알력, 그리고 국왕 선조의 오판 등 몇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었다. 

11. 이순신에게 결정적으로 불리한 두가지 사건, 즉 부산의 일본 진영 방화에 대한 논공사건과 고니시 유키나가 등에 의한 반간계 사건이 일어났다. 이 두가지 사건으로 이순신은 억울한 처벌을 받게 된다. 체포와 압송이 결정되었고, 이순신은 백의종군하게 된다. 2번째 백의종군인것이다. 

12. 원균이 이끈 조선수군은 칠천량해전에서 대패한다.

13. 초대 통제사 이순신이 파직 5개월여만에 제3대 통제사로 재임명된다. 

14. 정유재란을 일으킨 일본의 전쟁목표와 점령정책은 임진왜란 초기에 비해 크게 달라져 있었다. 당시 일본군의 전쟁 목표는 명나라 정벌보다는 조선점령, 그것도 강화 조건의 하나로서 할지의 대상이었던 하삼도점령이 우선목표였다. 이를 통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부족한 영지를 확보하고, 일본 백성을 이주시켜 일본땅으로 삼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 때문에 그들의 점령 정책도 바귀었는데, 하삼도의 조선 백성을 모두 없애고 일본 백성을 이주시킨다는 일종의 '초토화 작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정유재란 시기에 조선 백성이 겪은 피해는 임진왜란 초기에 비해 훨씬 더 컸다. 점령정책이 바뀌는 바람에, 일본군이 가는 곳마다 살육과 약탕이 벌어졌다.

15. 1597년 음력 9월 16일, 명량해전의 서막이 올랐다. 명량해전이 시작되자마자 이순신 함대는 10배이상 많은 일본군선에게 포위되었다. 처음에는 이순신이 승선한 대장선만 홀로 분전하는 가운데 다른 군선들은 이미 3~400미터이상 뒤로 물러나 있으면서 관망만 하고 나오지 않았다. 양측이 전투진형을 갖추고 또 해전이 시작된 뒤 대장선이 앞장서서 버틴 시간이 적어도 30분 이상 혹은 1시간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순신은 중군선에 명령을 내리는 대장기와 함대를 부르는 초요기를 동시에 올리며 깃발신호를 통해 휘하 전선들에게 전진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전투초기에 일본군선에 포위된 이순신의 대장선이 별 탈 없이 버티는 것을 지켜본 휘하세력 가운데, 중군인 미조항첨사 김응함과 거제현령 안위가 먼저 대장선으로 접근해 왔다. 전선 두척이 앞서서 일본군선들과 교전에 들어가자 나머지 저넌들도 일제히 이에 합세하여 13척이 모두 일본 함대와 맞서게 되었다. 그 뒤 본격적인 해전에 돌입한지 한 시간도 안되어 이순신함대는 우세한 화력을 이용해 일본군선 31척을 분멸했다. 

16. 이순신은 노량해전이 치열하게 전개되기 시작한 혼돈 초기에 적의 유탄에 맞아 전사했다. 노량해전은 대단한 혼전이었기에 이순신의 전사를 감출 수 있었다. 적도 아군도 통제사의 잔사를 모른채 전투가 이어졌다. 그 결과 노량해전은 11월 19일 정오경에 함정과 화력면에서 우세했던 조명연합수군의 대승으로 끝났다. 노량해전에서 일본군선 200여척을 분멸하고, 나포한 군선도 100여척이나 되었다. 

대한민국의  영웅은 맞지만그동안 지나친 영웅화로 인해 문제가 많았다. 제대로 된 연구가 되지않았고 정확한 역사인식을 가져다 주지도 못했다. 이제는 객관적인 시각에서 제대로 된 평가가 필요하다. 이 책의 내용이 100% 정확한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평가하려는 노력은 보였다. 이런 노력이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하며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임진왜란과 이순신에 대한 비교적 객관적이고, 정확하게 평가하려한 역사서!

오히려 이 점이 이 책을 읽고 나면 뭉클함과 애국심, 그리고 역사의 사실로써 받는 감동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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