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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e - EBS 역사채널ⓔ,국사편찬위원회 저

by monotake 2013. 12. 26. 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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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e
국내도서
저자 : EBS 역사채널ⓔ,국사편찬위원회
출판 : 북하우스 2013.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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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에서는 매주 역사채널 e라고 하는 5분짜리 역사 다큐멘터리를 방송한다. 이 책은 이것의 내용으로 만든 책이다. 5분짜리 다큐에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을 자세히 설명해준다. 

 

내용을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1부

01 어떤 젊음

1910년 12월 추운 겨울 밤에 조선의 한 일가는 압록강을 건넌다. 이 일가는 이회영일가로 조선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부자이다. 현 시가로 600억이상의 재산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 막대한 자금을 들고 이 일가는 조선의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간 것이다. 이 일가는 조선의 독립 자금을 댄것이다. 신흥무관학교를 만들고 흑색공포단을 만들고 상하이 임시정부에 자금을 공급했다. 하지만 이회영은 조선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한다.

 

02 이상한 밀지

임진왜란이 조선을 휩쓴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619년 후금과 전쟁 중이던 명나라에서 조선에 원군을 요청했다. 이때의 왕은 광해군. 이빨 빠져 가는 늙은 호랑이 명나라냐, 무섭게 성장하는 아기 호랑이 후금이냐. 두나라 모두에게 적이 될 수 없었던 조선이었다. 광해군은 고민 끝에 묘안을 생각해 낸다. 일단 명나라에 원군을 보내지만 상황을 보아 후금에 투항해도 좋다는 내용의 밀지를 보낸다. 광해군의 예상대로 명나라는 크게 후금에 패했고 조선의 원군을 이끈 강홍립은 후금에 항복하였다. 이로 인해 후금의 공격대상이 되지 않았다. 광해군의 지략으로 전쟁을 피한 것이다.

 

03 말의 길, 언로

조선시대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던 사헌부는 오늘날로 치면 언론기관이다. 조선시대에는 이들은 "대간"이라 불렀다. 이들은 임금이 잘못된 길로 갈때 마다 그들은 서슴없이 "이러시면 아니 되옵니다." 라고 말하며 군주를 바른 길로 인도하려 했다. 대간들은 대간불가죄(대간이 어떤 말을 하더라도 처벌하지 않는다)와 불문언근(어떤말을 하더라도 왕은 출처를 묻지 않았다)이라는 불문율로 처벌 받지 않았다.정책을 결정하는 왕이 가장 좋은 답을 찾도록 말의 길 언로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04 만 년 후를 기다리는 책

조선시대 기록을 담당하는 사관은 매일 국왕과 대신들의 언행을 관찰하고 빠짐없이 적었다. 그 기록을 사초라고 하는데 이는 실록을 편찬하기 위한 기초 자료가 되었다. 사관은 왕의 행동이나 말, 대신들과 있었던 일이나 대화만을 적지 않고 그들의 의견, 즉 '사론'을 기록했다. 사론은 생동감이나 현장감은 물론, 사론을 남긴 사관들의 당대 사건에 대한 역사 인식을 나타내주는 것이어서 의미가 있고, 재미를 더한다. 이 사초를 왕들이 보는 것은 금지 되어있었다. 사초의 내용을 보호하기 위해 실록이 완성되면 사초를 물로 씻어 내용을 지웠다. 이 사초를 기초해서 만든것이 조선왕조실록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의 역사 472년을 기록한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역사의 기록이다. 조선왕조실록은 1973년 국보로 지정되고 1997년에 훈민정음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조선으로 귀화한 장군 김충선

 

 

05 영웅과 역적 사이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을 이끌고 조선에서 싸우던 장군이 있었다. 그는 조선 침략이 명분 없는 전쟁이라 규정했다. 그리고 그는 조선의 장수가 되어 조국이었던 일본군에 맞서 싸운다. 일본 이름 스즈키 마고이치 흔히 사야가라 불리고 조선에서는 김충선으로 불리었다. 그는 조선에서 조총과 화포, 화약을 만드는 법을 가르쳤다. 일본에서는 그의 이름이 지워졌다. 조국을 버린 배신자이자 반역자이기 때문이었다. 김충선은 그저 평화를 바랬을 뿐이었다.

 

06 최고의 교육

조선시대에는 격대교욱이라는 것이 있었다.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손자를 가르치는 것을 말한다. 예절과 일상의 기본습관, 배변훈련, 각종놀이와 노래를 가르쳤다.  격대교육은 앞선 세대의 풍부한 지혜와 경험을 대물림해준다는 차원에서 소중한 우리의 교육법이다.

 

07 한류, 믿음을 통하다

통신사는 17세기 초반부터 19세기 초반까지 일본에 파견됐었던 사신이자 문화사절단이다. 일본은 조선사람들을 초청한 이유가 있었는데 임진왜란에 대한 복수로 조선이 일본을 침략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었기에 일본의 새로운 조력자는 조선과의 관계회복하는 일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조선은 일본의 요구가 달갑지 않았지만 전쟁을 다시 겪지 않기 위해 일본의 동태를 살필 필요가 있었다. 문화적으로 우위에 있던 조선의 통신사를 보기 위해 길가에는 수많은 구경꾼이 넘쳐났다. 오늘날로 치면 한류인 셈이다. 1868년 일본에 메이지유신이 들어서면서 통신사의 교류도 끝이 났고 1872년 부산에 있던 왜관을 무력으로 점령하면서 배신으로 나타났다.

 

 

윤두서 <자화상>

 

2부 나는 누구인가

01 자화상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천재화가로 꼽히는 3재는 진경산수화의 대가 겸재 정선, 겸제의 제자로 조선남종화풍을 창시한 현재 심사정, 그리고 공제 윤두서이다. 공재의 <자화상>은 조선후기 회화 역량의 절정이 집약되었다는 평가를 받으며 국보로 지정됐다. 윤두서는 조선에서 처음으로 풍속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김홍도보다 300년이나 먼저 서민의 삶을 그림으로 그린것이다. 

02 왕의 남자가 되는 법

조선시대의 환관은 우리에게 내시로 더 잘 알려져있다. 이 환관은 거세된 자들로 왕을 보필하는 수준의 일을 도맡아 했다. 이 환관들의 힘을 얻기 시작한 고려시대 의종때 부터였다 나이가 어렸던 의종은 환관에 많은 것을 의존했고 그 결과 환관정이하는 기형적인 정치형태가 나타났다. 고려말 환관의 폐단을 몸소 겪은 조선은 환관들을 추방하려 햇지만 그럴수 없었고 국가차원에서 엄격히 관리하기 시작했다. 환관 신청 자격은 8세 전후의 고환을 없앤 남자아이들로 제한하고 10년간 훈련과수련과정을 거쳐애 했다. 10년이 지난 후 심체검사를 받아 수염이 나거나 다른 신체적 결함이 발견되면 바로 출궁당했따. 환관 김사행은 경복궁 건립을 감독한 사람으로 이성계의 총애를 받았다. 영화 <왕의 남자>에도 등장하는 김처선은 직언을 세슴지 않는 대표적인 환관이다.

03 고향으로 돌아온 여인들

'환향녀'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대전란이 조선을 휩쓸고 지나간 후에 생긴 말로 '고향에 돌아온 여자'라는 뜻이다. 병자호란으로 약 50만명의 조선인이 잡혀갔는데 대부분이 여자였다. 청은 잡아온 인질을 성문밖에 모아두고 시장을 열어 '인질 장사'를 했다. 여인의 정절을 목숨보다 더 중히 여긴 조선의 사대부는 살육과 겁탈이 지나간 뒤 가문의 명예를 위해 여인들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을 강요했다. 

04 네 개의 단서 

효창공원에는 3의사 묘역이 있다.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이 3개의 묘 옆에 비석도 없고 없는 가묘가 있는데 안중근 의사의 가묘이다. 안중은은 사례를 받은 가톨릭 신자로 토마스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도마'라는 호는 세례명에서 온 것이다. 일제에 나라를 잃은 나라를 구할 방법은 무장투쟁 밖에 없다고 생각한 안중근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나가 의병활동을 시작했다. 그의 직함은 대한국 의군 참조중장이었다.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제국의 재무장관 코코프체프와 만주 하얼빈 역에서 만난다는  정보를 얻게 된다. 안중근 총 세발을 쏴 원수의 복부에 정확히 명중시켰다. 안중근은 러시아군에 잡혔다. 이때 "코레아 우라" 우리말로 "대한국 만세"라고 외쳤다. 일사천리로 진행된 재판으로 안중근은 사형을 선고 받았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4분에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05 조선의 이방인, 백정

백정이라는 말은 고려시대에 생겼다. 원래 백정은 농민을 가리키는 말이다. 조선시대는 법적으로는 양민과 천민, 양천제로 구분된 사회였지만 실제로 양반과 중인, 평민과 천민 이렇게 네 개의 계급으로 구성돼 있었다. 백정은 신분상 노비는 아니었지만 노비보다 더 멸시를 받았다. 백정들에게 신분상승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여전히 백정은 북방 오랑캐의 후손, 별종이었다.

06 조선의 시간

오랜 옛날 달력을 갖는다는 것은 곧 권력을 가졌음을 뜻했다.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나라를 세우면 달력을 만들어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어 군주가 "나는 천자다. 나만이 하늘의 시간을 읽을 수 있다."고 널리 알리는 최고의 홍보수단이었다. 달력을 나누어 주는 것은 임금의 임무였다. 하지만 제대로 된 조선의 달력이 아니었기에 문제가 많았다. 세종때 일식이 일어났는데 조선사람들은 일식을 하늘의 경고라 보았다. 예측한 시간에서 1각 오늘날의 시간으로 15분가량이 어긋났다. 세종은 이 15분의 오차를 줄이기 프로젝트에 들어갔다. 집현전 학자들을 대거 투입한 지 10년이 흘러서 세종 24년 조선의 달력이 완성 됐다. 칠정산이다. 칠정산은 글자 그대로 '일곱 개의 움직이는 별을 계산한다'는 뜻이다. 일곱개의 천체는 해와 달,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 오늘날 각 요일을 대표하는 행성이다. 칠정산은 내편과 외편으로 구성되는데 이를 점검하면 1년을 365.2425일로 오늘날의 계산과 거의 일치한다. 도쿄와 서울으 시차는 30분이나 되는데 우리는 일본의 수도 도쿄의 시간을 쓰고 있다.

07 보이지 않는 시선

1871년 신미양요 당시 미군이 소총, 대포와 함께 조선에 들고 온 무기가 있었다. 카메라였다. 그들의 사진은 서구 신문과 잡지 곳곳에 실렸다. 학살의 현장을 통해 조선은 세계에 그 이름을 알렸다. 사진과 사진 엽서는 이들에게 '제국의 시선'을 재생산하고 확대할수 있는 좋은 수단이었다. 일제의 초재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카메라의 힘을 알고 있었다. 그는 조선의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고종이나 순종의 모습은 황제다운 모습은 없었고 그저 일본식 복장을 한 나약한'식민지 군주'로 비쳐질 뿐이다. 조선사람들의 모습은 대체로 나약하고 무력하고 모자란 모습이었다. 일제는 이사진들을 대량생산해 서양에 퍼뜨리면서 자신들의 식민지배를 정당화 시켰다.


3부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

01 999번째 수요일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의 수요시위는 2011년 12월 1000회를 넘어섰다. 일본군'위안부'는 1930년대부터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하기까지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 성노예가 됐던 여성들을 가리키는 용어다. 상하이에서 일본군 지휘부는 강간사건을 방지한다는 명목하에 '위안소'를 설치하고 본토에서 위안부를 데려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주로 매춘부로 일하던 여성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 수가 부족해지자 일본군은 식민지의 여성들을 납치해 전장으로 끌고 갔다. 알본군 '위안부'는 성병도 예방하고 군의 사기도 진작시키면서 효과적으로 군대를 이끄는 수단의 하나였다. 성매매 시스템이었던 것이다. 일본군에게 '위안부'는 전쟁터에서 쓰고 버리는 소모품과도 같았다. 광복을 했지만 위안부들은 자유의 몸이 될수 없었다. 일본군은 증거 인멸을 위해 일본군'위안부'들을 구덩이에 몰아넣고 사살했다. 구사일생으로 귀환해도 '위안부'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고향사람들은 등을 돌렸고, 어른들은 가문의 수치라고 했다.  1991년 8월 14일, 한국여성단체연합 사무실로 찾아온 김학순 할머니는 그간의 침묵을 깼다. 전쟁범죄를 은폐해왔던 일본은 충격에 휩싸였다. 한국 정부 또한 당혹스러웠다. 덮어지나 했던 60여년 전의 이야기가 다시 수면 위로 부상한 것이다. 

02 기억을 기억하라

안네는 1929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났다. 제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나치가 네달란드를 점령하고 유대인 체포령을 내리자 안네의 가족은 다락방으로 숨어들어야 했다. 그해 6월 12일 안네의 생일에 일기장을 선물 받는다. '키티'라는 이름을 붙인 일기장에 공포스러웠던 순간들을 채워나갔다. 2009년 유네스코는 안네의 일기를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했다. 

18살 서울 명성여고 2학년이었던 소녀는 4.19혁명에 사실적인 기록을 남긴다. 1960년 3월 15일 제4대 정부통령선거가 있엇는데 부정선거로 이승만이 당선되었다. 4월 11일 마산시위에서 시작된 분노가 4월 19일 서울 시내 학생들이 총궐기로 나타났다. 구호는 '이승만 하야와 독재정권 타도'였고 다급해진 이승만 정권은 무력으로 이를 진압하려했다. 소녀는 이 당시기록을 일기로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1980년 광주여자고등학교 3학년생이었던 소녀는 5월에 전남도청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었다. 노트에는 '시사노트'라는 제목을 달고 대학노트에서 본 것, 생각한 것, 느낀 것 들을 가감없이 적고 신문자료를 스크랩해 두었다.  이노트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과정을 적고 있고 이 기록물은 다른 자료와 함께 2012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안네의 일기 한 구절-종이는 인간보다 더 잘 참고 더 잘 견딘다.

03 1894년 그날

조선의 중심 학문은 성리학이었다. 후기에 들어오면서 새로운 학문이 나타나는데 하나는 서양에서 흘러온 서학이었고 이에 대응해서 나타난 동학이 그것이다. 학문이지만 종교였고 사회변혁을 꿈꾸며 이를 받아들였다. 그들이 그린 세상은 평등한 사회였다.  1894년 갑오년 1월에 농민들이 조병갑의 학정을 참지 못하고 관아를 습격했다. 이 중심에는 전봉준이 있었다. 이를 계기로 3월 20일 정식으로 결의문을 발표했다. 전국적인 투쟁을 하겠다는 선전포고를 한것이다. 1894년 4월 7일 동학농민군과 관군의 전투는 고부의 나지막한 야산 황토현에서 벌어졌고 동학군이 승리했다. 여세를 몰아 여러곳을 점령하면서 세를 불려나갔다. 4월 27일에 전주성까지 점령했다, 다황한 조정은 청나라에 원군을 요청했고 2천여명의 청나라군인이 아산에 상륙했다. 이에 일본군도 군대를 보내겠다고 했다. 동학농민군은 물론 조정도 예상못한 파견에 충격을 받았다. 조선이 외세의 다툼에 불바다가 될 상황이었다. 조정은 동학군과 햡상을 벌였고 개혁안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동학군은 해산한다. 최초로 농민군과 정부가 약속을 한것으로 이를 전주화약이라고 한다. 동학군이 해산했지만 일본군은 요지부동이었다. 6월2일 김홍집을 앞세운 친일내각을 만들었고 경복궁을 강제로 점령하고 일본의 지휘를 받는 '개화파 정권'을 탄생시켰다. 아산만에 정박해 있던 청나라 군함을 급습했다. 이것이 청일전쟁이다. 그리고 6월 25일에는 낙후된 조선을 근대화시켜주겠다면서 제1차 갑오개혁을 강행하였다. 조선은 이렇게 일본의 식민지로 몰락해가고 있었다. 이에 동학농민군은 다시 일어났다. 1894년 11월 9일 우금치고개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하지만 군사훈련을 받은 정규군을 당해낼 리 없었다. 동학농민혁명은 세계사에서 유래를 찾기 어려운 '아래로부터의 혁명'이었다. 동학농민혁명은 중국의 태평천국운동, 인도의 세포이 닌과 더불어 민중항쟁으로서 세계사에 뚜렷한 획을 그었다.

04 어떤 반란

임진왜란 당시 왜군을 피해 선조가 궁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본 백성들으 통곡했다. 군주가 백성을 버리고 가는 모습에 깊은 배신감을 느꼈던 것이다. 

05 승자 없는 전쟁

신미양요는 미군이 조선과 수교를 맺고자 벌인 전쟁이다. 조선군의 피해는 심각했다. 미군은 손돌목에 높이 휘날리던 '장수 수'자가 새겨진 황색 깃발을 전리품으로 챙겼고, 그곳에 성조기를 걸었다. 하지만 조선은 패배를 인중하지 않았고 그들이 요구한 수교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흥선대원군은 척화비를 세우고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했다.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은 근대체제를 만들었고, 제국주의 대열에 합류했다. 이에 조선은 그들의 첫 먹이감이 되었다. 1876년 일본과 강제적으로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을 맺고 나라의 문을 연것이다. 조선의 쇄국정책은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06 100년 만의 귀환

야스쿠니 신사구석에 있던 조선의 비석.'조선국함경고임명대첩비'라는 정식 명식의 북관대첩비이다. 북관대첩비는 임진왜란 당시 북관에서 일어난 전쟁에서 큰 승리를 기념하는 비석이다. 일본군 2만2천여명의 군대가 정문부 장군이 이끄는 의병 200명에 크게 패한 전쟁의 기념한것이다. 1905년 러일전쟁시 일본군이 발견하고 이를 야스쿠니 신사로 가져간것이다. 이 북관대첩비는 남북한의 합동노력으로 원래 있던 장소에 세워졌다.

07 폭파 위기의 덕수궁

덕수궁은 원래 조선세조의 큰손자인 월산대군의 집이었다. 궁으로 쓰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때 평안도 의주로 피난했던 선조가 다시 한양으로 돌아오면서 부터이다. 이름도 없던 궁에 광해군은 '경사로운 기운이 모여 있다'라는 뜻의 경운궁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고종은 이 경운궁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경운궁은 20세기 초 국권을 빼앗기는 과정에서 여러사건이 벌어진 격동의 현장이었다. 을사늑약이라는 비극적 역사의 현장이 바로 덕수궁 내 중명전이었다. 고종은 1907년 네달란드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해 을사늑약의 무효를 선언하고 대한제국의 주권 수호를 호소하려는 계획이었지만 실패했고, 이는 일본이 고종을 황제 자리에서 내쫓는 빌미가 되었다. 이때부터 경운궁은 황제의 궁궐이 아니었다. 고종에 이어 황제가 된 순종은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고 경운궁에 계신 태황제 고종에게 "덕을 누리며 오래 사시라"는 뜻에서 '덕수'라는 이름을 올렸다. 1910년 경솔국치로 온 나라가 통째로 일제의 손아귀에 넘아가면서 조선왕조는 건국된지 519년 만에 쇠망하고 말았다. 덕수궁은 조선왕조 500년의 몰락을 함께한 비운의 궁궐로 기억됐다. 덕수궁은 1950년 한국전쟁 발발로 또 한차례 시련과 마주친다. 주일대표 공사로 있던 김용주는 미군의 인천상륙작전계획을 듣게 된다. 이때 김용주는 맥아더 장군을 찾아가 서울을 포화보다는 포위하는 작전으로 가달라고 부탁했다. 문화재가 파괴는 것을 막아달라는 의도 였다. 이를 맥아더 장군이 받아들인다. 김용주와 함께 은인이라 할만한 미국인이 있는데 포병중위였던 제임스 해밀턴 딜이다. 덕수궁에 수백명의 북한군이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궁에 포를 떨어뜨리면 한순간에 섬멸할 수 있었지만 포격하지 않고 기다렸다. 덕수궁을 빠져나와 을지로를 지날때 공격을 했다.   

다양한 역사의 뒷이야기가 있는 책이다. 뒷이야기가 재미있고 자세하고 쉽게 적혀있다.

원래의 다큐멘터리는 http://home.ebs.co.kr/historye/main 로 들어가서 무료로 다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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